일.일.홍.영.(날이면 날마다 오는 홍콩 영화-덕질 계정)
banner
dudu1211.bsky.social
일.일.홍.영.(날이면 날마다 오는 홍콩 영화-덕질 계정)
@dudu1211.bsky.social
-당분간 장렬하게 덕질하기 위해 재개장함.
필자는 이진칸 -> 이쿠타 -> 중화거리 순으로 돌다가, 바다를 구경하고, 오전 일정을 마쳤다. 이때 나중에라도 알아보고 싶었던 것을 떠오르는 대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2) 이쿠타 신사(生田神社)

신사가 '의외로' 일본인들에게 진정한 신앙의 대상이라는 것은 최근에 알았지만, 각 신사를 읽거나 보는 법은 지금도 전혀 모르겠다.

이쿠타(生田)라는 말 자체는 생기 있는 땅을 의미하며, 이 땅의 신을 지킨하다혀 이쿠타 신사이다. 연애와 결혼으로 유명하다.
June 28, 2025 at 11:56 AM
도시 내부는 가보면 이와 같다. 신고베역에서부터 걸어내려가면 편하고, 고지대에 외국인 구역, 중간에 이쿠타 신사(生田神社), 그리고 저지대에 중국인 거리가 있다. 그 밑에 다시 호텔 등의 해변 시설이 있는 상태.

에도 막부 말기(19c 말) 이래 요코하마나 나가사키 등과 함께 대형 개항장이었고, 90년대까지는 동아시아 최대 무역항 중 하나였지만, 95년 한신 대지진 당시 막대한 피해를 입어 그 세를 회복하고 있지 못하다.
June 28, 2025 at 11:50 AM
도시 입지는 보다시피 오사카는 물론 관동으로 통하는 관문에 있으며, 가야, 신라, 백제, 당나라 등과 교역할 때 물건이 거치는 통로라고 볼 수 있다. 고베의 옛 명칭은 후쿠하라(福原)이며, 중세에 잠시 수도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내 추측으로는 교토와 연결된 외항이 아닐까 싶은데, 이 부분은 다시 알아볼 필요가 있다.

흔히 일송무역(日宋貿易)이라고 중국과의 교류를 칭하는데, 이때 쓰는 지도는 다음과 같다.
June 28, 2025 at 11:44 AM
(이외 전쟁 중에 천수각이 불타는 경우도 있고, 그냥 불타는 경우도 있고, 다양하다.)

그런 상황에서, 히메지의 천수각은 '육군이 시설로 사용하는 성'으로서 존성처분을 받은 몇 안 되는 성채이며, 전쟁 중에도 타지 않는 등의 행운이 있었다.

그 결과 에도 시기 이래 예전의 모습을 비교적 온전하게 갖추고 있는 바, 그 시절의 성곽이 어떻게 생겼는지 체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중요 실례라고 볼 수 있다.
June 28, 2025 at 6:07 AM
히메지는 인구 50만의 중소 도시다. 대단한 명물이 있는 것은 아니나, 성 하나는 확실히 꼭 볼만하다. 일본의 성들은 성터나 성곽은 보존되어 있어도 성의 건물 -천수각-은 부서지거나 원형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폐번치현(1871) 전후로 지방의 다이묘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그 거점이 될만한 성을 철거했기 때문이다. (다이묘들이 실효지배하는 '번'을 무너트리고 국가가 중앙통시하는 '현'으로 바꾼 사안이기 때문에 그렇다.)
June 28, 2025 at 6:04 AM
당시가 5월 초였는데, 골든 위크의 막바지이자 오사카 국제 박람회가 한창이었다. 관심이 없어 보러 가지는 않았고, 이때 호텔비 등이 너무 높아 부득이하게 오사카 근처 도시를 둘러보기로 -친구와-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더워지기 시작한 이때에, 우리는 히메지라는 도시를 기점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히메지(姫路)는 오사카의 서쪽, 산맥의 남쪽에 있는 도시이다. (본디 산맥의 남은 양(陽, 요)이라 하고, 북쪽은 음(陰, 인)이라 한다. 드는 햇빛을 기준으로 산요/산인이 나뉜다.
June 28, 2025 at 6:00 AM
그리고 이 사이에서, 이 전복된 아름다움 사이에서, 작가는 루카스를 통해 어떤 소수자성을 발화하는 것이다. (그런 부분이 하나 있다.) 그 발화가 약간 도드라짐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을 지니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그래, 작가님이 그렇다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예쁜 게 최고다.

(+물론, 이 '어여쁨'은 어떤 의미에서 중화권에서 방영되던 '따거물'을 좀 생각나게 하는 면이 있다. 이 미학들의 상당 부분이 <패왕별희>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홍콩의 특정 영화들에 상응 되어 있다.)
June 20, 2025 at 7:19 PM
그런데 이 남성형/여성형은 남성성/여성성을 교란하는 효과가 존재한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젠더에 의거해 어떤 행동을 기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남성형에게 여성성으로 분류된 감각을 선사함으로서, 캐릭터에게 격차를 부여해 매력(혹은 미학)을 부여함과 동시에, 젠더의 틀을 묘파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반대에도 마찬가지이며, 사실 악역 캐릭터의 악행과 그 동기를 구별하여 서술할 줄 아는, 그 작가의 깊은 '장맛'이 발동한 결과라 볼 수 있다.
June 20, 2025 at 7:15 PM
이에 반해, 이 작가는! 여성형 이름을 가진 캐릭터에게 자주 '강함'을 부여한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구인류 여성의 모습을 했었던 프라이부르크 교구 주교님이 계실 것이고, 주요 악당으로서 소름끼치는 두려움을 주는 엘리자베트 호엔촐레른 또한 여성형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 율리아(굳센 정통성), 네포무치나(무투파) 등이 존재함을 기억해달라.

취향이라면 참으로 푸르고 곧은 소나무인데, 필자 또한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임을 밝힌다. 킁킁.
June 20, 2025 at 7:13 PM
그렇다면 이 안에서, <장미의 이름>이 위치하는 바가 무엇인가?

글쎄? 그것이 진리의 불가능성이라도 말했나 보지!
June 20, 2025 at 5:08 PM
하지만 그 타자가 열렬히 소망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짐"이다. 부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회에서, 내가 "환대" 받기를. 이 안에서 엘리에 감동하는 루카가 탄생하는 것이다. (486) 그리고 그 "환대"는, 자신이 이 환대를 거두지 않겠노라, 망각하지 않겠노라 약속하고 약속한다. 그것은 부질 없지만, 그래도 마음으로부터 사람을 기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엘리가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June 20, 2025 at 5:08 PM
이렇게 기억/망각, 진리/일반은 그 자체로 하나의 쌍을 이루지 않나 싶긴 한데. (몇 번이고 말하지만 정확하진 않다.) 그렇다면 이 '다름' 안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

(진리는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며, 우리는 이미 불완전한 채로 온전하다.(망각))

여기서, 루카스가 이방인이요 타자임을 생각해달라. 루카스의 무겁고 혼란스러운 뇌는 그 자체로 이질적이며, 사실 그 안에서 산출되는 '진리에 가까운 것'은 묵직하고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June 20, 2025 at 5:04 PM
다시 말해, 망각만이 사람을 새로운 환경에서, 전 세대에 붙잡히지 않은 채, 새로운 길을 향하여 나아가게 할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대의 사람들은 기록하면서도 망각하는 양면성 아래 살아가고 -죽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 망각이 소중하듯, '그냥 사람', 진리에 한없이 멀어보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사실 생명에는 핵심적인 이들이다. 그들이야말로 루카스의 옆에서 설 수도 있을 것이고, 최소한 돈 주면 밥은 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June 20, 2025 at 5:01 PM
진리는 추론이라는 불안정한 사다리에 의거하며, 사실 그 자체는 필요조차 하지 않다.

이 소설에서 (465화의, 기차에서 토론하는) 기억/망각은 그 지점에서 핵심적인 범주이다. 기억은 진리(루카스)와 한 쌍이고, 망각은 신생(新生)과 한 쌍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사람은 왜 망각하여 미숙해지는가? 루카스는 기억과 진리를 옹호하지만, 이 소설의 소결에서 그런 게 꼭 작동하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은, 노인(기억)이 아니라 엘리(망각, 신생)에 의해 구해진다.
June 20, 2025 at 4:59 PM
노인들은 루카스야말로 세상의 파멸을 불러올 '무언가(완전함)'라 생각하지만, 사실 소설 초반에 제시되듯 그는 완전하지 못한 존재이다. 탄산수소나트륨 -A.K.A 달고나-이 보여주듯, 그는 실로 지독한 '요리치'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지만, 그는 '사먹음'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이가 아니다. 다시 말해, 그는 반드시 타인이 필요하다. (ㅠㅠ)

이 이항대립의 상황에 근거하여. 저자는 진리(완전함)의 개념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말한다.
June 20, 2025 at 4:54 PM
(지금의) 내 생각에, 마차살 440-490이 말하는 것은 진리의 불가능성과, 그로 인한 '받아 들여짐'(환대), 혹은 우리의 온전함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가 서로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먼저, 이 소설은 루카스의 뇌 안을 보여주면서 "아카식 레코드" "바벨 이전"에 한없이 가까운(近似) 천재를 보여준다. 이는 그 자체로 진리에 '가장 가까운' 무언가라 할 수 있다.
June 20, 2025 at 4:51 PM
물론 이때에도 우리는 물을 수 있다. 왜 <장미의 이름>인가? 왜 479화에서 명확하게 지적되듯, 장미의 이름이 각종 언어로 (제임스 조이스처럼) 쓰여 제시되는가? 그것은 이 소설의 주제와 무슨 상관을 가지는가?

이는 <장미의 이름> 그 자체가 이 소설의 주제와 연결되기 때문일 터다. 그래야만 이것이 '핵심적으로' 등장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파우스트>-성경-<장미의 이름> 등이 이어지는 이유를 감 잡을 수 있을 터이다.)
June 20, 2025 at 4:47 PM
난 사실 이 인용-재구성의 '기능'을 잘 모르겠다. 그것 자체가 지식을 '즐거움'으로 다루게 한다는 지점만은 본능적으로 알겠지만, 그것이 또 신념(신력, 이데올로기)과 어떤 관계를 맺게 하는지 잘 감이 오질 않는다. (아마 그것은 그의 기호학을 보아야지만 알 수 있는 것 아닐까 싶긴 한데. 이제 여기까지 하면 내가 학과가 바뀐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라틴어 인용(해석 없음)은... '이질'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마차살>은 이 부분을 따와 인용하고, 원문을 번역 없이 썼었던 것 같다.
June 20, 2025 at 4:44 PM
<마차살>에 등장한 이 신념이야말로 에코가 주장했던 것에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협과 달리 이런 애매한 표현 쓰는 이유는, 판타지의 기반이 되는 서구 자료를 대부분 제대로 못 읽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신념'이 인용구에 기반하여 서술된다는 점이다. 나는 이 부분이 정확한지 전혀 모르겠지만, <장미의 이름> 같은 소설은 막대한 양의 인용구가 소설에 등장하며, 이 인용은 소설가의 맥락에 맞게(원문이 아니라) 재구성되어 있다.
June 20, 2025 at 4:41 PM
어르신들이 재미있는 걸 하고 계셨네.

sinology.org/archives/243
‘경파(京派)’ 또는 ‘해파(海派)’
sinology.org
May 27, 2025 at 11:39 AM
아니 근데 영미 애들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닌가? 지들만 재미있는 거 봄...
May 27, 2025 at 11:26 AM
물론 가장 근저가 되는 책은 이것일 것이다. 이 (별로 좋지 않을지언정 지독하게 매력적인) 노스텔지어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면이란. 아무래, 언젠가 본 <800>(2020) 영화 한 편 때문에 이러는 거 같긴 하다.
May 27, 2025 at 11:17 AM
첨언으로, 근래 상하이 문학(해파문학)이 몇 권 번역되었다. 내가 막 해파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던 게 2019-2024 사이라서, 의외로 마땅히 볼 책이 없었다. 툭하면 절판... 그런데 의외로 근래에 2권이 나오니, 일단 사두었다. 나는 그들의 경박함이야말로, 사실 -무겁기 그지 없는- 중국에서 탁월함의 비결이 된다고 생각한다.
May 27, 2025 at 11:14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