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
yihan.bsky.social
이한
@yihan.bsky.social
역사글쟁이, 아무거나 씁니다.
이유없이 만들어진 이야기는 없어요. 사람이, 자원이, 생명이 쥐어짜내어진 식민 통치가 바로 조선에 박혀있던 쇠말뚝이 아닐까요.
조선 사람이라면 아무리 똑똑하고 잘났어도 출세 못하고 고작 동네 경찰(순사)이나 할 수 있고, 지도 교수에게 "너희 조선인은 유전적으로 일본인보다 열등하다"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맘잡고 일본인이 되고자 해도 철저하게 차별받고 쳐내어지는데- 그렇기에 쇠말뚝을 뽑고 독립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February 25, 2024 at 4:15 PM
철마다 돌아오는 각설이가 일본이 근대화를 해서 조선에게 좋은 일을 해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좋은 식민통치란 없습니다. 일본의 식민통치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선진국! 열등한 니들이랑 다르지롱!" 이라고 이일 저일 벌이다가 잘 안 풀리면 조선 니들이 미개해서 그런거야! 하면서 조선을 팹니다.
비유가 아니라 리얼 물리적으로요. 어우 언시빌라이즈드해.
그런데 쇠말뚝 이야기가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 사람들에게 믿어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겁니다.
February 25, 2024 at 4:15 PM
그래서 수백년이 흐른 뒤 일제시대 때 과연 전국의 산에다가 쇠말뚝을 박았을까요. 과연 그랬을까요.
뭐...
태평양 전쟁에 쓸 쇠가 없어 놋그릇에다 솥, 수저까지 공출해갔다는 이야기는 과장이면서도 또 과장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은 근대화라고 쓰고 서구화라고 읽는 과정을 거친 나라였지요. 그런 일본이 언시빌라이즈드 하고 언옥시덴트한 풍수? 푸웅수우? 그걸 하겠냐고 그 양반들이?

전문가가 아니면서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February 25, 2024 at 4:14 PM
임진왜란 살짝 들여다봐도 명나라 군대는 도와는 줬지만 동시에 폐도 엄청 끼쳐서 "일본군이 얼레빗이면 명나라 군대는 참빗이다." 즉 쫙쫙 긁어간다라고 했으니. 서로간에 감정은 별로 안 좋았다는 말이지요.

명나라 사람들도 할 말은 있었습니다. 대체로 조선을 위해 파병되기는 했지만 남의 나라 전쟁에 싸워주는 게 달가울 리 없고, 보급도 메롱하고, 말들은 다 죽고 해서 조선 관리들과 기싸움 벌이는 등 미적지근한 태도였습니다. 뭐 같은 밀덕인 류성룡을 만나 의기투합한 낙상지의 경우도 있었지만.
February 25, 2024 at 4:14 PM
그래서 이여송이 조선 곳곳을 다니며 쇠말뚝을 박아 맥을 끊어놓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여송이 집(명)에 돌아가 아빠 이성량에게 자기가 한 일을 자랑했는데(할 일이 따로있지), 이성량은 "거기 우리 조상님이 살던 덴데! 네가 우리 집안 기운을 끊어놨구나!" 라고 한탄을 했고 결국 이여송은 나중에 몽골과의 전쟁에서 져서 목이 댕강 날아갔다 합니다. 실제로 그랬고요.
이여송이 정말 그랬느냐, 글쎄요. 이여송은 고려 때 중국으로 건너간 성주이씨의 후손으로 굳이 말하자면 조선계이지만 당사자는 그런 정체성은 그닥 없었습니다.
February 25, 2024 at 4:14 PM
이것은 이전부터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임진왜란 즈음부터 유행했던 이야기거든요. 다만 그 주인공은 일본군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파견되었던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입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에 와보니, 산맥마다 정기가 철철 넘쳐나고 있어 영웅호걸들이 태어날 천하의 명당이었다는 겁니다. 아니 그 정기 다 어디로 가고 일본에게 맥을 못 추고 있었냐라는 말이 불쑥 솟아납니다만 뭐 이야기니까요.
February 25, 2024 at 4:13 PM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속상하게 하는 건 부모의 자식 차별입니다. 열 손가락 중 반지끼는 손가락 따로 있다는 것이고, 이쁜 자식에겐 떡 하나 더 주고 계란 후라이 더 얹어주고 재산 더 주는 차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편애에는 기준이 없었습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듯이.
January 3, 2024 at 6:30 AM
이렇게 보면 부모의 사랑은 과연 자식을 잘 키울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망하게나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으시다면 이번에 새로 나온 책을 봐주세욤.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
January 3, 2024 at 6:24 AM
동비는 국왕의 명령으로 어머니의 여러 남자 중 한 사람의 딸로 결정되었고, 따라서 법적으로 근친상간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적형들은 서자 동생을 모함했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이번에도 서자의 판정승이라고 해야할 거 같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모든 재산을 물려받고 근친상간의 혐의도 벗은 서자 동생이야 말로 모든 행복을 누렸을 거 같은데 그것도 아니었으니. 재산을 물려받아도 신분이 없으니 온갖 이권다툼에 뛰어들었고, 말년에는 삼수갑산에 가 있고 그 자식은 여진족에게 잡혀갔으니 웬지 망한 듯 합니다.
January 3, 2024 at 6:24 AM
그렇긴 한데 집안 사람들이 전부 얘(이름은 동비)를 딸로 여겼습니다. 뭐, 닮았나보져...
그럼 대체 왜 서동생은 고르고 골라 자기 조카일 수도 있는 사람을 자기 첩으로 들였을까. 그것도 철천지 원수가 되어 수십년 째 재산을 두고 소송을 벌이던 형의 딸을. 정말 몰랐던 것일까. 정말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걸까. 혹시 취향이었나 등등. 온갖 무시무시한 상상이 들지만 넘어가겠습니다.
아무리 조선이 야만의 시대라고 해도(아님) 근친상간은 큰일이었습니다.
January 3, 2024 at 6:18 AM
그래서 그걸 적자들이 내비뒀냐, 하면 그건 아니고... 고소를 해도 해도 안 되니까 혐의를 만들어 죄를 씌우는데, 무려 근친상간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믄 적형 중 한 사람이 첩에게서 서녀, 그러니까 딸을 두었는데 이걸 서동생이 첩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조카를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맨날 그러던데요? 모르고 그럴 수 있죠! 라고 말하기엔 뭔가 이상한 점이 하나나 둘이 아닌데. 우선 첩이 여러 남자를 거쳤기에 아버지(적형)는 딸을 자기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January 3, 2024 at 6:17 AM
그 꼴을 두고볼 수 없었던 형제들은 재산을 놓고 수십년 동안 소송을 벌입니다. 그리고 이긴 것은... 놀랍게도 서자 쪽입니다.
왜냐하면 재산의 주인인 아버지가 준다고 했으니까! 물론 이 일이 적서의 구분이 별로 안 심했던 조선 초기인 것도 있겠지만. 역대의 모든 왕들이 '권제 걔 왜 그랬대?' 하며 쯔쯔대긴 했어도 이 결정이 번복되진 않았습니다. (아마도 상당했을) 권제의 재산 대부분은 서자 권추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January 3, 2024 at 6:17 AM
이 와중에 넷째아들인 권람은 아버지에게 반항하다가 두들겨 맞고 가출했고, 딸 하나는 아예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가족들의 관계를 개판으로 만들어 둔 뒤 권제는 세종 27년에 행복하게 세상을 뜹니다. 그 뒤로 가족들이 사이좋게 지낼 리 없었습니다. 재산을 놓고 치열하게 물고 뜯었지요.
물론 이후의 권람은 수양대군이랑 한명회랑 친구 먹고 정난공신까지 되었으니까 당분간 권씨 형제(적자)들은 형 덕도 보고 공신도 되고 잘 살았습니다만, 문제는 아버지가 재산을 모두 서자에게 물려줬다는 것.
January 3, 2024 at 6:15 AM
그런데 이 아저씨, 아니 분께서는 위대한 업적과는 별개로 거대한 사고를 치셨으니 첩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집안 재산을 몽땅 첩의 자식에게 물려준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사실 권람은 정실 부인인 이씨를 두고 있었는데, 원래는 사이가 좋았던 지 아들 여섯에 최소한 딸 둘 이상을 두었습니다. 만약 정말 안 맞았으면 그 많은 자식들도 안 태어났겠지요. 아무튼 권제는 사랑에 눈이 멀어 부인과 이혼하고 자기 자식들을 협박해서 가진 재산을 모두 첩의 자식에게 물려줍니다.
January 3, 2024 at 6:15 AM
생각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본처의 자식들에게는 가문의 재산을 물려주고, 첩과 서얼자식들에게는 아버지 본인이 일궈낸 재산을 줬습니다.
본처의 자식은 가문의 대를 잇는 존재고, 첩의 자식들은 아버지를 돌보며 잡다한 일(농사)을 도맡아했습니다. 같은 자식이라도 공과 사가 분명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분명한 선을 넘어서게 하는 것이 사랑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조선 건국공신 권근의 손자이자, 권람의 아버지인 권제였습니다. 사실 권근과 권람은 유명하지만 권제는 누구? 싶겠지만 조선 최초로 안동권씨의 족보를 만든 집안의 위인입니다.
January 3, 2024 at 6:14 AM
양반에게 본부인은 가문 및 사회의 반려로서 지위와 권리를 가지지만 첩은 아닙니다.
사랑하니까 첩으로 들이지요? 라고 하면 꽤 나이브한 발언이고, 사실 양반들은 집안일 해줄 사람으로서 첩을 들였습니다. (젠장) 홍판서도 춘섬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태몽 때문에 동침을 했고. 그래서 첩은 소박을 놓기도 쉽고 인연을 끊는 일도 쉬웠고. 그런데 가끔 정말로 사랑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딱히 큰 일은 없었습니다. 애초에 공자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문명사회에서 적서의 차별을 만든 것은 후계 때 벌어질 개싸움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January 3, 2024 at 6:13 AM
난중일기를 보다보면 이순신이 3일 연짱 술 마시고 토사곽란으로 쓰러져서 10번 넘게 토하는 내용들이 나오는데, 이걸 보다보면 그러게 적당히 드시지 그랬수... 하며 북엇국을 끓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정작 조선사람인 그에게 국을 내밀면 이게 뭐냐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술은 몸 안 상하는 정도로 작작 마시는 것으로 하자구요.
October 17, 2023 at 1:17 AM
그렇다고 정말 아예 해장 안 하고 살았던 것은 아닌 것 같고, 구한말의 요리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을 보면 메밀가루를 넣고 끓인 물에도 부스러기 국수를 넣은 '국수물'이라던지, 칡가루를 재료로 설탕이나 꿀 넣고 생강즙 넣어 끓여만든 '갈분응이'가 숙취에 좋다고 합니다.

뭐 이 정도는 정말 술 마시고 난 다음 속 풀어주는 데 좋았을 지도.
October 17, 2023 at 1:17 AM
목은 이색같은 사람은 술 퍼드러지게 마시고 나서 자기 전에 아예 술이 든 은병을 화로 옆에 두고 잤으니. 자는 동안 화로의 온기로 술이 데워져 그냥 마실 수 있었기 때문. 그 외에 정도전이나 장유나 서거정이나 성호 이익이나 모두 해장술을 외쳐댑니다. 현재 전주에는 막걸리에다가 계피와 설탕 등을 넣고 끓인 모주라는 음료가 있어 이걸로 해장을 할 수 있다는데.
현존하는 술꾼들이 그렇게 막걸리를 끓여댈 거 같진 않습니다. 그냥 생술을 들이키고 말지.
October 17, 2023 at 1:14 AM
단백질이 없잖아! 라고 한다면 그러게요.
그리고 해장국이라는 말 보다는, 1900년대 초에 '술국'이란 말이 더 널리 쓰였습니다. 대체로 아침 일찍 일하는 노동자들이 일하기 전이나 후 술 한잔과 함께 따끈한 국을 먹는 형태더군요.
그러나 진정한 해장의 왕자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술...... 이름은 들어보셨나 해장술. 술 마시고 뻗어 자고 일어난 뒤 눈 뜨자마자 들이키는 모닝알콜. 그야말로 해 뜨자마자 마시는 술이라서 아침 묘시(5시-7시)의 이름을 붙여 묘주라고 불렀습니다.
October 17, 2023 at 1:14 AM
그래서 그 다음 날, 반쯤 시체가 되어 기어다니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음식이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고춧가루는 없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에나 들어오고, 요리에 널리 쓰이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소고기나 돼지뼈, 콩나물이 흔했냐 하면 그것도 글쎄. 분명 뭔가 먹긴 했을 텐데 술에 꼴았던 양반들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 녹차, 박(흥부가 톱으로 썰었던 그 박), 칡꽃, 가지, 조개, 복숭아(...) 등등.
October 17, 2023 at 1:14 AM
해장은 원래는 해정(解酲)에서 온 말인 거 같은데 바로 술에 취해 몽롱한 것을(酲) 풀어준다(解)는 뜻입니당. 요즘 해장하면 역시 칼칼하게 고춧가루를 푼 콩나물국이나 북엇국, 선지국이나 기타등등을 떠올리겠는데. 조선시대 사람들은? 아무래도 옛 사람들도 사람이다보니 술 들이퍼붓고 난 다음 날에는 숙취로 고생했습니다. 유득공은 두통을 앓고 이순신은 토사곽란을 하고 박제가는 음주승마를 하고- 그러게 왜 그렇게 많이 마셔가지고 - 는 됐고.
October 17, 2023 at 1:13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