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banner
rjqnr.bsky.social
파이
@rjqnr.bsky.social
그 옛날 아쉬움에 한없이 웁니다
주코프에 대한 더욱 복합적인 감정은 망명 소련 작가 이오시프 브로츠키의 시 「주코프의 죽음에 부쳐」*(1974)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낯선 땅에 그는 얼마나 많은 병사들의 피를 뿌렸던가!
그래, 그는 애석해했는가?
민간인의 침상에 누워 죽어갈 때 그는 그들을 기억했는가?
침묵뿐이다.
지옥에서 그들을 만나면 그는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나는 전쟁을 수행했다."

-------------------------------------
*러시아어 전문은 iosif-brodskiy.ru/stikhotvoren... 에서 읽을 수 있음.
February 2, 2026 at 1:05 AM
궁금해져서 검색해보니 개봉했었네요. 동아일보에 실린 영화평이 있습니다.
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
그런데 다른 기사 보니 불법복사판이라고 고소가 들어오고 했었네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
February 2, 2026 at 1:00 AM
주코프의 장례식은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에서 가장 큰 국가적 행사였다. 그의 네 딸인 에라, 엘라, 마르가리타, 마리아도 참석했는데, 이들이 모두 함께 있는 모습이 포착된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February 1, 2026 at 4:36 AM
주코프는 갈리나가 사망하기 전 병원으로 그녀를 보러 갈 수 없었다. 갈리나는 모스크바의 유명한 묘지인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주코프는 지팡이를 짚고 바그라먄의 부축을 받으며 장례식에 참석했다.
January 31, 2026 at 6:25 AM
69년 4월, 당 중앙위원회는 주코프의 회고록에 대한 어떠한 서평, 논평 또는 발췌도 발표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러나 7월에 《코무니스트》는 바실렙스키가 쓴 길고 매우 긍정적인 서평을 게재했는데, 그는 현명하게도 주코프 개인의 업적을 낮추고 대신 그의 애국심과 공산당 및 소련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했다.
January 30, 2026 at 2:59 AM
주코프와 깊고 오래 지속된 우정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바그라먄 정도뿐이다. 주코프가 바실렙스키와 가까웠던 시기가 있었으나, 흐루쇼프 치하에서 치욕을 겪는 동안에는 그렇지 않았고 그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둘의 사이가 멀어진 것은 주코프의 딸 에라가 바실렙스키의 아들 유리와 이혼하면서 더 심화했음이 분명하다.
January 29, 2026 at 1:05 AM
회고록을 쓸 때, 주코프는 직접 타자를 하지 않았고 구술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손으로 쓰는 것이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하며 손으로 직접 글을 썼다. 그가 쓴 원고를 갈리나의 어머니인 클라브디야 예브게니야가 타자했다.
January 28, 2026 at 2:32 AM
주코프의 다차에는 영화 상영실이 있었다.
January 27, 2026 at 12:55 AM
주코프는 갈리나와 함께 볼쇼이 극장을 포함해 자주 공연장을 찾았으나, 발레보다는 오페라를 선호했다.
January 26, 2026 at 2:54 AM
주코프는 대조국전쟁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위한 인터뷰를 받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관한 영화의 대본은 주코프가 광범위한 수정을 했으며, 그는 속어를 사용하면 젊은이들의 교육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제작진에게 속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January 25, 2026 at 1:46 AM
5월 8일, 주코프는 크렘린의 기념행사 참석 요청을 받았으며, 그가 회의장에 들어서자,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다음 날 주코프는 승리 퍼레이드를 사열하는 원수들 사이에 있었다. 이후 주코프는 모스크바 작가 클럽에 가서 대본 없는 연설을 했으며, 콘스탄틴 시모노프는 그의 절제와 겸손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2/2]
January 24, 2026 at 1:16 AM
흐루쇼프의 실각 이후 주코프의 복권은 즉각적이지는 않았으나 오래 지체되지도 않았다. 65년 3월, 주코프는 당 지도부에 편지를 보내 자신이 흐루쇼프의 독재적 성향의 희생양이었음을 근거로 자신의 복권을 주장했다. 이 편지에 대한 답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한 달 후 소련 관영 통신사인 TASS는 주코프의 오랜 숙적이었던 코네프가 주코프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내보냈다. 코네프는 주코프에게 결점이 있긴 했으나, 다가오는 대조국 전쟁 승리 20주년 기념행사에 당연히 참석해야 할 위대한 군사 지휘관이라고 말했다. [1/2]
January 24, 2026 at 1:16 AM
흐루쇼프는 주코프를 국방부 장관직에서 해임할 때 다른 자리를 찾아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그 약속은 무산되었고 1958년 2월 의장단은 주코프를 군에서 퇴역시켰다. 소련 기준으로 볼 때 대우가 안락한 편이기는 했다. 그는 넉넉한 연금, 후한 의료 혜택 및 경호 지원, 개인용 소형차 한 대를 받게 되었다. 또한 자기 아파트와 다차를 계속 보유할 수 있었고, 본인이 원할 경우 군복을 착용하는 것도 허용되었다.
January 23, 2026 at 1:22 AM
주코프는 그라놉스키 거리에 있는 아파트를 작은 아파트 두 채로 바꾸어 개인적 위기에 대응했다. 한 채는 알렉산드라, 다른 한 채는 딸 엘라에게 내주었으며, 자신은 갈리나와 마리아와 함께 다차에 가서 살았다. 엘라와 에라 모두 1965년 부모가 이혼할 때까지 그들의 사실상 별거 상태를 알지 못했다.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매는 어머니의 편을 들었으며 1년 넘게 주코프와 말을 섞지 않았다. [2/2]
January 22, 2026 at 4:49 AM
알렉산드라는 스베르들롭스크 시절부터 갈리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모스크바로 왔다는 사실과 갈리나의 딸 마리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4년이 지나서야 마리아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주코프가 마리아를 자신의 딸로 공식 입양하기 위해 법적 아내의 허가가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1/2]
January 22, 2026 at 4:49 AM
1957년 10월 28일과 29일, 주코프의 해임과 비난을 승인하기 위해 중앙위원회가 소집되었다. [...] 중앙위원회 총회에 바실렙스키는 병으로 불참했다. 그가 주코프에 대한 비난에 동참했을지는 말하기 어렵다. 분명 그는 그렇게 하도록 기대받았을 것이고, 두 사람의 관계는 1960년대 주코프가 두 번째로 복권될 때까지 소원한 상태로 유지되었다.
January 21, 2026 at 4:20 AM
57년 갈리나와의 사이에 갓 태어난 딸 마리아가 황달 증세가 있고 활기가 없으며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은 주코프의 답장: 우리 딸의 건강에 대한 당신의 편지를 받은 후 밤새 한잠도 못 잤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 딸이 너무 걱정돼. ... 당신이 강해지기를, 운명에 굴복하지 않기를 간청해요. 나약함은 투쟁에서 결코 승리를 가져다주지 않아요.
January 20, 2026 at 4:50 AM
57년 1월과 2월, 주코프는 대대적으로 홍보된 인도와 버마 순방에 나섰다. [...] 주코프가 귀국하자 소련은 〈G. K. 주코프 소련 원수의 인도 및 버마 친선 방문〉(Визит дружбы маршала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Г. К. Жукова в Индию и Бирму)이라는 제목의 컬러 다큐멘터리 영화를 개봉했다.
January 19, 2026 at 1:40 AM
트로야놉스키는 〈콰이강의 다리〉를 상영 중인 모스크바의 한 영화관에서 주코프와 마주쳤다. 트로야놉스키가 이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주코프는 "나에게는 너무 평화주의적이군. 나는 〈나바론의 요새〉처럼 총격전이 있는 영화가 더 좋네. 나는 군인이라네, 자네와는 분야가 다르지."라고 대답했다.
January 18, 2026 at 8:52 AM
[...] 두 사람 모두 정치인이 되어 있었고, 상대방이 10년 전 베를린에서 알았던 그 옛 군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대통령의 거처를 떠나면서 주코프가 트로야놉스키에게 언급했듯이 말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장군과 같은 사람이 아니군." [2/2]
January 17, 2026 at 8:32 AM
당시 소련 외무차관이었던 안드레이 그로미코에 따르면, 주코프 또한 아이젠하워만큼 실망했으며 대통령이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어 몇 마디 상투적인 말만 늘어놓았다"라고 말했다. "나는 주코프가 마음이 상했다는 것을 알았고, 귀국길에 그는 소련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논평을 남겼다." [1/2]
January 17, 2026 at 8:32 AM
몇 년 후 지금 제네바에서 그는 억눌리고 걱정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 그는 마치 글자 하나까지 완벽하게 익힐 때까지 주입받은 교훈을 반복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는 활기가 없었고, 예전처럼 웃거나 농담하지도 않았다. 나의 옛 친구는 상관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이 사적인 대화에서 슬픈 감정밖에 얻지 못했다. [2/2]
January 17, 2026 at 8:32 AM
주코프와 아이젠하워는 훈훈한 사이였지만 아이젠하워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전시의 협력 관계에서 주코프는 독립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으며, 분명히 공산주의 교리를 수용하면서도 어떤 작전 문제에 대해서든 기꺼이 나와 즐겁게 만나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1/2]
January 17, 2026 at 8:32 AM
55년 제네바에서 주코프는 아이젠하워와 두 차례 공식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통역을 맡은 외무부 관리 올레크 트로야놉스키의 회고에 따르면, 주코프는 회담에서 불가닌과 흐루쇼프의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의사 진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매우 품위 있고 외교적인 태도를 보였다. 주코프는 평판만큼 엄한 지휘관의 모습으로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응할 수 있는 인물인 듯 보였다."
January 16, 2026 at 5:01 AM